책에 대한 예의

이사를 한 달 앞두고 묵은 짐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무엇부터 손을 댈까 집안을 둘러보던 중 방 한 구석을 가득 채운 묵은 책에 눈길이 멈췄다. 이사 온 뒤 손 한번 대지 않은 책들이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십 수 년 째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 중 오래된 소설책을 하나 꺼내 후루룩 넘겨보았다. 책 사이에서 영화 표 한 장이 떨어진다. '아, 그 땐 그랬지.' 20년 전 종로, 한 극장의 모습이 기억을 스친다.

책을 읽을 때 마다 근처 손에 닿는 것들을 책갈피로 삼아왔다. 영화티켓, 영수증, 명함, 글씨가 써진 메모지, 토익학원 수강권 등등. 이런 것을 꽂아 놓으면 책을 읽었던 당시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생긴 버릇이다. 그 버릇은 지금도 여전하다.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아 앞으로도 읽지 않을 것 같은 책들을 꺼내 놓았다. 꺼내놓고 보니 양이 꽤 많았다. 먼지도 상당했다. 먼지 쌓인 책을 정리하며 이것은 너에게도 나에게도 불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본분과 가치를 잃고 자리만 차지하며 천덕꾸러기가 된 것이 책에게 불행이고, 읽지 않는 책을 마주할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고, 좁은 집 여러모로 공간을 손해 보는 것이 나에게 불행이리라.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책들을 정리하기로 했다. 읽을 만한 책들을 골라 지인들에게 의향을 물어 선물하기로 했고, 5년 이내로 구매했던 책들은 구립 도서실에 기증하기로 했다. 도저히 떠나 보낼 수 없는 책은 그대로 책꽂이에 꽂아 두었다. 영 못쓸 것 같은 것들은 잘 묶어 분리수거 하는 곳에 놓아두었다. 읽던, 폐지로 쓰던,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것이다.

먼지 쌓인 책꽂이를 걸레로 닦으며 '비움'이 주는 '풍요'를 느꼈다. 나에게 의미 있는 책을 여러 사람들과 나눌 수 있어서 풍요로웠고, 비워진 책장 속에서 여유를 느낄 수 있어 풍요로웠다. 가득 채우는 것에서만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책은 계속 사겠지만 잊고 쌓아 놓는 일은 만들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이 소중한 책에 대한 예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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